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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환자의 치료 접근성 악화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생명을 구하고 질병을 예방하는 필수재이자 공공재적 성격이 강한 의약품은 전통적으로 무관세이거나 최소한의 관세가 부과되어 왔다. 국제 사회는 의약품에 대한 관세가 국가 간 건강 불평등을 악화시킨다고 판단해 의약품의 접근성을 최대한 강화하는 방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꺼내 든 관세협상 카드에는 의약품의 특수성에 대한 고려 같은 건 애초부터 없다.
관세 부과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5월5일 ‘핵심 의약품 자국 생산 촉진을 위한 규제 완화 행정명령’을 시작으로 미국 내에 생산 기반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어서 5월12일에는 ‘최혜국 약가’ 개념을 적용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미국 소비자가 더 이상 타국 대비 2~3배의 약값을 지불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단순한 시장 조정이 아닌, 정책적 압박의 신호였다.
또한 7월31일에는 미국 내 약가를 다른 선진국의 최저 수준과 일치되도록 하거나 그 이하로 낮출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주요 제약업체 17곳에 발송했다. 서한은 트루스 소셜(Truth Social·트럼프 대통령이 만든 소셜미디어 플랫폼) 계정을 통해 공개됐다. 이 서한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제약사들이 주저할 경우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9월29일까지 이행 계획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의약품에 무거운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엄포와 관련해 가장 최근인 8월5일 CNBC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는 “의약품에 대해 소규모 관세를 부과하겠지만 1년~1년 반 안에 150%, 그 이후에는 250%까지 인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생산기지를 미국으로 이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 시차를 두고 관세를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트럼프의 일련의 행보는 의약품 생산 시설을 미국으로 옮기게 해서 미국 약가를 인하시키기 위한 것으로 읽힌다. 또 수입의약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 자국 생산 의약품을 보호하려는 전략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 흐름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보고서가 연초에 제시된 바 있다. 3월, 트럼프 행정부와 밀접한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연구소(AFPI)는 “미국만이 신약 혁신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며 유럽 등 선진국에 약가 인상을 압박할 것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즉, 미국의 약가를 낮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럽 등 주요 선진국의 약가를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이런 가운데 글로벌 빅 파마인 미국 제약회사 일라이릴리가 내놓은 8월14일자 성명은 미국 정부와 제약사 간의 보이지 않는 공조를 공식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일라이릴리는 “혁신적 치료제의 비용을 선진국들이 공정하게 나눠야 하며, 이를 위해 유럽 국가들은 더 높은 약가를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영국 정부와 협의 끝에 GLP-1 계열 비만치료제 ‘마운자로(Mounjaro)’의 약가를 인상하되 NHS(영국의 공공의료 서비스 시스템)의 환자 접근성은 유지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는 미국 정부의 의약품의 자국 내 생산과 약가 인하, 관세 부과 정책이 미국 시장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보이자 트럼프의 의약품 관세 부과와 관련한 일련의 행보가 글로벌 시장의 약가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다만 글로벌 제약산업 전체가 ‘미국 중심의 가격 체계’ 재편에 발맞추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 것은 아직 이르다.
시장 전문가들은 영국에서 비급여 품목인 마운자로의 약가를 인상하기로 한 것에 대해 이것이 글로벌 시장의 약가 인상 신호탄인지 일라이릴리가 트럼프 달래기용으로 던진 카드인지 애매모호해 아직은 분석하기 어려운 시점이라고 진단한다.
한국을 포함한 주요 선진국의 경우 국가건강보험 시스템이 구축돼 있어 보험급여 약가에 대한 조정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영국의 사례는 비급여 품목인 마운자로의 유럽 대비 낮은 약가에 대한 조정의 성격이 더 크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일라이릴리가 미국과 주요 선진국들의 약가 균형에 대해 트럼프와 비슷한 입장을 표명한 반면 관세 부과에는 반대 입장을 확실히 하고 있다는 점도 이러한 분석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일련의 의약품 관련 정책 기조는 다른 주요 선진국들이 국가별로 급여 약가를 협상할 때 보험당국보다 제약사의 약가 인상 주장에 힘을 실을 수 있는 방향성을 갖는다. 즉 혁신 신약들의 약가 인상이 현실화될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 반열에 오른 우리의 국내 상황을 살펴보면 혁신 신약의 신속한 국내 허가에도 불구하고 실제 환자 접근성을 보장하는 급여 협상은 난항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로 약가 줄다리기가 원인이다.
유럽 등 주요 선진국의 약가 인상이 현실화되면 결국 도미노 현상으로 우리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희귀질환 치료제, 면역항암제처럼 가격이 높은 품목은 급여약가 협상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환자의 접근성을 더욱 떨어뜨리게 된다.
트럼프의 약가 정책이 미국 소비자에겐 일시적 부담 경감을 안길 수 있겠지만, 세계적으로는 ‘의약품 인플레이션’이라는 역풍을 불러올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다. 미국 중심의 의약품 시장구조 재편 과정에서 소외되는 이들의 치료 접근성을 누가 책임질 것인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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