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은 나균 감염으로 발병하는 한센병을 앓았던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 한센병은 조기 진단과 다제약물치료로 완치가 가능하지만, 과거 많은 환자들은 사회적 배제와 강제 격리를 겪어야 했다.
스카이데일리는 한센인의 삶을 조명하고 그 시간을 사회적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앞으로 2차례에 걸쳐 한국한센총연합회가 지난해 12월 발간한 ‘한센인의 구술기억’ 1·2권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이번 1권 편에서는 남성 구술자인 기다윗·이장욱(가명) 씨의 구술을 중심으로, 병과 낙인 속에서 이어진 삶의 궤적을 전한다.
어린 시절, 병과 함께 시작된 삶
기다윗(가명) 씨는 남성으로 1927년생이다. 어머니는 서른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칠십 가까이 살았다. 그는 형제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고, 일곱 남매 중 딸은 하나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형제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서울에 사는 둘째 동생 한 명만 남았다.
몸의 이상 신호는 어린 시절부터 있었다. 여덟 살 무렵 어머니는 아이가 자주 아프고 기운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고, 기다윗 씨는 열 살 무렵부터 ‘병’이라는 것을 또렷이 의식하기 시작했다. 어린 동생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가 “병든 아이는 두고 성한 아이가 먼저 갔다”며 울던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치료는 길고 거칠었다. 시대에 따라 주사와 약이 바뀌었고, 그는 다이아손·프로민·DDS 계열 약을 거쳐 왔다. 약이 몸에 맞지 않을 때는 정신이 없을 만큼 힘들었고, 재발이 오면 고통은 더 컸다. 숨이 막히고 코가 막히며 입이 바싹 마르는 상태가 이어져 잠도 제대로 이루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는 치료를 이어가며 버텼고, 의사에게 “이제 약을 안 먹어도 괜찮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약을 끊은 지 오래다.
병은 가족들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그는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자녀도 뒀다. 그러나 자녀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환자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부모들의 반발을 겪었다. 결국 아이들은 기존 학교를 다닐 수 없었고, 따로 마련된 분교에서 모여 공부해 졸업했다. 그는 자녀들의 결혼과 가정도 멀리서 지켜봐야 했다.
낙인과 강제 격리 속에서 버틴 삶
외모 변화는 낙인으로 이어졌다. 결절이 생기고 얼굴이 붓거나 눈썹이 빠지는 변화가 나타나면 사람들의 시선이 곧바로 달라졌다. 버스나 기차를 타기도 어려웠고, 들키면 쫓겨나거나 폭력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는 결국 걸어서 이동하는 일이 많았다.
가족 안에서도 병을 숨겨야 했다. 아내는 2014년 4월18일 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장례에 가지 못하고 소식만 들었다. 병이 알려지면 가족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자녀들의 배우자나 사돈도 그의 사정을 모른 채 지냈고, 큰딸은 뒤늦게 사정이 드러나며 이혼까지 겪었다. 그는 결혼식 참석 자체를 마음에 담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열두 살 무렵의 기억도 또렷했다. 어느 여름 아침, 발등이 크게 부었는데 통증이 없어 그대로 딛고 다녔다. 상처는 속에서 썩어 갔고, 습한 날씨에 파리가 들끓었다. 한 달 넘게 지나 어머니가 발을 씻기며 상태를 확인하자 상처 위에 구더기가 붙어 있던 것이 드러났다. 그는 그때 “감각이 없어 아픈 줄도 모르고 병이 깊어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강제 격리와 폭력의 기억도 남아 있다. 병이 드러나면 소록도로 끌려가듯 이동해야 했고, 붙잡히면 맞는 일이 잦았다. 그는 그 시절을 “법도 없는 세상 같았다”고 기억했다.
먹고사는 일은 현장 노동으로 이어졌다. 하수도 공사, 도로 공사, 집 짓는 공사 현장을 오가며 하루 종일, 때로는 밤까지 일했다. 전봇대를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일이나 농사 품일도 가리지 않았다. 월급은 적고 일은 많았지만, 그마저도 붙들고 버텨야 가족이 굶지 않았다. 그는 그 시기를 ‘피나는 노력’이라고 했다.
세월이 흐르며 세상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는 박정희 정부 시절 미국 선교사들이 옥수수가루와 밀가루를 가져와 굶주림을 덜어준 기억을 떠올렸다. 선교회 권유로 땅을 마련해 정착을 시도했고, 이후 양계 사업에 뛰어들었다. 닭장을 짓고 사료를 마련하며 규모를 키웠고, 계란을 대량으로 생산해 트럭으로 서울에 올려 보낼 만큼 사업이 궤도에 올랐다. 그는 그 시절 전국에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됐다.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고 돌아오는 생활을 이어 왔다. 그는 청년들과 나라, 사람들의 삶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하며 “오늘 하루를 살게 해 준 것에 감사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기다윗 씨의 기억은 병의 고통을 넘어 가족과 삶을 가로지른 상처와 생존의 기록으로 이어진다. 그는 그 시간을 말로 남기며, 지나온 세월을 되짚는 동시에 오늘을 살아갈 힘을 다져 왔다.
유년기, 상실과 함께 시작된 삶
이장욱(가명) 씨는 1942년생 남성이다. 그는 젊은 시절 ‘한센병’이라는 병명보다 ‘문둥병’이라는 낙인이 먼저 돌던 시대를 지나왔다. 병은 몸에만 남지 않았고, 가족과 관계, 삶의 선택까지 오래 붙잡아 왔다.
그는 열한 살 무렵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는 서른여섯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1년쯤 뒤 재혼했다.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바가지에 밥을 담아 드시던 모습, 배불리 드시지 못하던 장면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기 전날까지 논에서 일하다가 쓰러졌고, 시골에는 의사가 없어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장례 뒤에는 “많이 울고 나니 어느 순간 울음도 나오지 않더라”고 말했다.
병은 열네 살 무렵 시작됐다. 그는 어릴 때라 잘 몰랐지만, 어른들은 알고 크게 동요했다. 아버지는 그를 의사에게 데려갔고, 당시 치료는 상처 부위를 뜯고 파내는 방식이었으며 약은 없었다. 상처가 잘 낫지 않자 엿을 붙이거나 나무껍질을 붙이는 등 별 방법을 다 써 봤고, 이후 서울에서 다시 수술을 받아 호전됐다.
그는 소록도에 대해 “20대에 2년 정도 짧게 살았다”고 말했다.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갔다. 그곳에서는 어르신들이 많아 밥을 하고 수발을 들고 청소를 하며 월급을 받았다. 소록도에서 DDS 약을 먹기 전에는 신경통이 심했지만, 복용 뒤부터는 한결 나아졌다. 그는 장애 인정을 요청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당시에는 병명이 지금처럼 정리되지 않았고 사회의 시선은 강력한 낙인으로 작동했다. 동네에서는 생활공간마저도 나뉘었고, 가까운 관계에서도 거리감이 생겼다. 그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동네 사람들이 우물도 함께 쓰는 것을 꺼려 밤에 몰래 물을 퍼 마신 적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병력은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사정으로 남아 가족에게조차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결혼 이후의 삶과 숨겨야 했던 병력
결혼은 친구 소개로 이뤄졌다. 아버지는 “성한 사람을 얻어라”라고 했고, 그는 ‘성한 사람’과 가정을 꾸렸다. 그가 소록도에서 나와 한센인 생활시설에 온 지 2년쯤 됐을 때였다. 그는 스물일곱, 아내는 스물넷 때 만났고 첫째는 그해 겨울 무렵 태어났다.
다만 예식장은 갈 수 없어 집에서 검은 담요에 이름을 써 붙여 혼례를 치뤘다. 장인은 한센병을 앓아 소록도에 있었고, 장모만 결혼식에 왔다. 그가 배구하는 모습을 본 장인이 그 모습을 마음에 들어해 혼사가 이어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 그였지만 자녀의 결혼식에는 온전히 설 수 없었다. 그는 결혼식장에 갔지만 문 아래로 조용히 들여다보다가 돌아왔고, 딸 결혼식 때도 딸이 혼자 입장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지금도 병력은 가족 안에서 말하기 어렵다. 사돈과 며느리들은 이를 모르고 있으며, 아들들은 “양로원에 계신다”고 설명해 왔다. 그는 알려질까 늘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의 기억은 시대의 폭력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전쟁을 겪었고, 그 이전 일본의 강요와 공출의 장면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버지는 무교였지만 그는 기독교 신앙을 선택했다. 그는 “늘 자녀를 위해 기도하며 마지막까지 아프지 말고 편안한 삶을 살다 가고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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