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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유전자의 노예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존재인가?” 이 질문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에드워드 O. 윌슨은 흥미로운 답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 본성을 ‘후성규칙(epigenetic rule)’이라고 정의했다. 후성규칙은 생물의 유전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행동 양식·인지 방식·발달 경향 등을 규정하는 생물학적 제약이다.
원어인 ‘epigenetic rule’을 보면, ‘epi- (ἐπί, 그리스어)’는 ‘위에, 덧붙여’라는 뜻이고, ‘genetic’은 ‘유전적’을 의미한다. 즉 후성규칙은 ‘유전 위에서 작동하는 것’으로서, 유전자가 두뇌 발달 과정에서 만드는 제약과 경향성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 문화를 만들어갈 때 가능한 방향과 한계를 설정해 주는 생물학적 프레임워크가 된다.
하지만 이 규칙은 절대적 명령이 아니라 '경향성'이다. 결국 ‘후성규칙’ 개념은 인간이 유전자에 완전히 지배당하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은 독특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윌슨은 “문화의 발달조차도 이런 후성적(後成的) 규칙들의 영향 아래 있다”고 주장했다.
후성규칙의 대표적인 예는 언어 습득 능력이다. 인간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다. 이는 생물학적 조건이다. 하지만 어떤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를 어떻게 발전시킬지는 인간의 선택과 창조력이다. 한국어의 복잡한 경어법, 프랑스어의 우아한 표현법, 독일어의 논리적 구조가 그렇다. 각각의 언어는 동일한 생물학적 기반에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문화적 산물이 된다.
근친상간 회피 성향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으로 근친상간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근친교배는 유전자의 결함을 강화하여 종의 생존에 치명적 결과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생물학적 경향성이 각개 사회마다 어떤 제도로 실현되는지는 별도의 문제이다. 특히 현대 한국사회는 엄격한 족외혼을 지향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밀당'은 아주 흥미롭게 전개된다. 집단생활을 추구하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독특한 사회적 결속을 만들어냈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깊은 유대를 형성하고, 지구 반대편 사람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가상공간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든다. 생물학적 본능은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지만 그 충족 방식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따라 놀라운 방식으로 진화한다.
인간은 생물학적 경향성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한다. 개인의 생존과 번식을 우선하라는 유전자의 '명령'을 거스르며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예술과 학문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한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유전자의 운반체가 아니라 가치를 창조하고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질문이 부각된다. 후성규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존재는 희망적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창조적 본성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생물학적 토대와 상호작용하며 상상초월의 문화적 혁신을 만들어낼 것이다.
인간에게는 유전자의 완전한 지배도, 완전한 자유도 없다. 오직 생물학적 조건과 끊임없이 협상하고 때로는 저항하며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할 뿐. 후성규칙이 말하는 인간의 능동성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본질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경향성과 합작하여 문화를 만들어가는 밀당의 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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