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05] 작별 인사 없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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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5-16 06:22:00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오정일은 의식을 잃은 채 가느다란 호흡만 내쉬고 있었다. 호흡은 산소가 아니라 몸속에 남은 영혼이었다. 가족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던 영혼이었다. 인간의 의지는 불가항력의 섭리도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아버지는 저승사자의 손아귀에 매달린 생명줄을 간신히 버티고 버텼다. 저승사자에게 부탁한 걸까. 만날 사람이 있다고, 할 말이 있다고, 그때까지만 숨을 거둬가지 말라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넋이 나간 상태로 응급실에 도착한 승연의 어머니, 승호와 승미는 응급실 입구에서부터 울기 시작했다. 보기 전엔 믿지 못했다. 승연 모친은 온몸이 새까맣게 탄 채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는 남편을 보자마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승호와 승미는 야수의 울음소리를 내며 절규했다. 아버지를 꼭 살려달라고 의사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애원은 억지였다. 사람의 형태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생명체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입고 있던 피복은 살갗에 달라붙은 채 살과 화학섬유 탄 내를 풍겼다. 머리카락이 타 버린 자리는 시뻘건 피딱지로 채워졌고 사이사이 허연 속살이 비쳤다. 어느 곳도 만질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부둥켜안으면, 아버지는 그대로 재가 될 것 같았다. 인간의 존엄이라곤 눈곱만큼도 엿보이지 않는 처참함이었다.

승연 가족은 아버지가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병원에 실려 왔는지 영문을 몰랐다. 응급실까지 아버지를 따라왔던 임원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소리 질렀지만, 그들은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해고 노동자가 뿌린 휘발유에 사장님이 그만…. 윤 부장은 말끝을 흐렸다. 승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승미는 뒷걸음치면서 소릴 질렀다. 왜, 당신들이 아니고 하필 우리 아빠야, 왜, 빨리 불을 못 껐어, 뭘 기다린 건데 왜, 왜, 왜! 승미는 윤 부장의 멱살을 잡았다. 그 새끼가 누구야, 우리 아빠 옷에 휘발유 부은 새끼가 누구냐고, 죽여 버릴 거야!

아버지는 수술할 상황이 아니었다. 의사는 산소호흡기로 몇 분, 몇 초만 연명할 수 있게 조치할 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산소호흡기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위해 처치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이 남아 있을 때 무슨 말을 하려는지 혼신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승호와 승미가 다가갔다. 가까이서 아버지 얼굴을 보니 분노와 공포가 느껴졌다. 아버지 힘겹게 눈을 뜨려 하자 승미가 아버지 귀에 대고 말했다.

저예요 승미, 아버지 큰딸. 아버지 살려낼 테니 조금만 버텨요.

승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왼손 새끼손가락을 펴 흔들었다. 승연을 찾는 신호였다. 아버지는 승연을 지칭할 때 새끼손가락을 펴 흔들곤 했다. 막내라는 뜻이었다. 어디 있는지 연락이 안 돼요, 아빠. 승미의 흐느끼는 소리가 칼로 살을 긋는 것보다 날카롭고 아팠다. 오정일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승미의 비명이 병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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