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만사만감(萬事萬感)] 대통령님, 의사 선생님, 환자 좀 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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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3-15 06:31:00

나이가 들면서 기능이 약해진 탓일까, 개강 철이라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간 탓일까? 엊그제 화장실 불통 사건이 발생하여 고통의 하루를 지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짐작컨대, 몇 년 전 담낭을 응급으로 떼어 낸 이후부터 지치고 힘들면 가끔씩 발생하는 병이다. 화장실에서 몇 시간을 끙끙대다가 119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갔던 경험도 있다. 평소 관리를 잘 해야 하는데 몸을 보살피는 데 게으르다 보니 병이 도졌다. 위 아래로 약을 투약하고 소식을 기다려도 답이 오지 않았다. 기운은 점점 빠지고 온몸에 땀이 흐르고 아랫배는 핵폭탄 전쟁 상황에 도저히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산의 진통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다가 마침 집에 있던 딸아이를 시켜 119에 전화를 하게 했다.

“엄마, 요즘 병원 응급실 가면 엄청 고생할 텐데? 좀 기다려 보는 게 어떨까?” 딸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과다 복용한 약물 때문에 장은 용틀임을 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병원에서 관장했던 시원한(?) 기억도 있고 하여 일단 전화를 걸게 했다. 접수된 지 3분 만에 딸의 전화벨이 울렸다. 119 구급대였다. 사정은 딱하지만 응급실에 접수가 어려울 것이니 좀 더 지켜보고 가까운 병의원을 찾아보라고 안내해 주었다. “방금 암환자를 싣고 종합병원 응급실 갔었는데 환자가 너무 많아 도로 집에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이래.” 딸이 상황을 전했다.

이제 응급실 문은 닫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몇 년 전 고통과 수치감으로 범벅되었던 나를 친절하게 관장해 주었던 응급실의 천사표 의사 선생님들을 만나기 힘들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이 순간을 견디고 헤쳐 나가야 할까? 개강 날, 학생들에게 모든 유기체의 임무는 생명 보존이라고 가르쳤다. 생명을 보존하려면 ‘나’라는 내부적 조건이 ‘환경’이라는 외부의 요인에 어떻게든 잘 적응해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 내 상황을 분석했다. 투약 결과는 끔찍했다. 불통의 원인은 건조함인데 약 기운은 아직 문제에 도달하지 못했다. 언제 효과가 날지 모른다. 그 전에 죽을 것 같다. 고통의 시간이 3시간이나 흘렀다. 우리 집 비데는 작동을 안 한다. 오랫동안 사용 안한 탓이리라. 비데가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과 비데를 수리하지 않은 게으름에 대한 자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살아야 한다. 무언가 해결책을 내야 했다. 다행히 나는 집집마다 구조가 동일한 아파트에 살고 있고, 바로 몇 층 위에는 수 십 년을 알고 지내는 어른이 산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평소 부탁하는 걸 매우 꺼리는 나였지만 일단 생명을 보존, 아니 그보다 당장의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했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했더니 지금 밖에서 친구를 만나는 중이라고 한다. 말씀 못 드리고 포기하려는데 다정한 이웃께서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으시더니, 내 사정을 듣고는 현관 비밀번호까지 가르쳐 주었다. 마침 아무도 없으니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딸의 부축을 받으며 그 댁의 은밀한 장소에 들어가 따뜻한 물줄기의 도움으로 드디어 ‘해산’을 했다.

4시간 만의 일이다. 딸이 옆에서 엄청난 잔소리를 퍼붓는다. “엄마, 평소에 유산균 안 챙겨 먹었지? 그것도 안 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니 도대체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아? 비데 당장 고치고!”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엄마 멍청한 거 인제 알았냐? 너도 고생 많았다.” 아이 낳는 것보다 힘들었던 시간을 지내며 몇 가지를 되짚었다.

우선 열린 진화에 대한 단상이다. “열린 진화에 대한 생각은 우리 인간에게 결단의 자유를 부여한다. 인간다운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과 의무, 이들은 그 어느 곳에도 미리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운명과 의무를 선택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교수이며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란츠 부케티츠의 글이다. 열린 진화는 모든 선험적인 목적을 부정한다. 인생에는 주어진 목적이 없다. 단지 ‘결단의 자유’만 있을 뿐이다. 나는 그날 여러 가지 결단의 선택지를 두고 분초를 다투며 고민을 거듭했다.

또 하나는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했던 이야기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긍지를 가지고 살 이유가 있어요. 여러분의 유전자에는 이타성(altruism)이 들어 있답니다. 나와 여러분, 우리 모두는 남을 돕고 공감한 조상들의 후손이에요. 이타성은 생명 보존과 후손 번식에 필수적인 요소이지요. 조상이 서로 돕고 이해한 덕분에 살아남아 자식을 낳을 수 있었고, 그렇게 살아온 조상의 후손으로 우리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것이지요.” 학생들이 환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

그렇다.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지 못한다면 이미 인간이 아니다. 공자님 말씀이다. ‘인(人)은 인(仁)이다.’ 우리 한국인은 공감과 사랑의 인(仁)이 유전자에 박혀 있다. 나는 다정하고 친절한 이웃 어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누구는 내가 엄살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화장실 문제가 칼럼거리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날 종일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대통령님, 그리고 의사 선생님! 제발 환자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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