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만사만감(萬事萬感)] 칼라하리의 혈연선택이 현생인류를 일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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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20 06:31:10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건기는 가혹하다. 풀 하나 살아남을 수 없는 숨 막히는 태양 아래 강바닥이 쩍쩍 갈라진 모습을 드러낸다. 습기라곤 없으니 모래바람만 거세다. 물 없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동물들이 오아시스를 찾아 정처 없는 길을 떠난다. 말이 좋아 오아시스지 그들이 찾는 것은 그저 작은 물웅덩이고 지하수다. 이곳에선 태양이 만물을 살리고 기른다는 말은 무색하다. 한 톨의 물을 두고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이 이 지역 동물들의 삶이다.

초식동물 중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아프리카코끼리는 가모장 사회를 이룬다. 몸이 크니 두뇌도 큰 것일까? 나이 많은 가모장 코끼리의 머릿속에는 건기를 견딜 물웅덩이 지도가 그려져 있다. 손자에 증손자까지 합쳐진 가족을 이끌고 할머니 코끼리는 몇 백km를 걸어 물을 찾는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은 작은 물웅덩이는 수컷 코끼리 몇몇이 독점하고 있다. 그들은 생명수를 양보해 주지 않는다.

코끼리 무리는 하는 수 없이 다른 물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가는 길에는 사자 가족도 있다. 굶주려 죽게 된 사자는 평소 같으면 상대도 안 되는 거구의 코끼리를 필사적으로 공격한다. 이판사판이다. 결국 지친 코끼리 한 마리가 쓰러지고, 얼마 안 가 건기의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가모장 코끼리도 세상을 뜬다. 코끼리 가족은 할머니를 애도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한때 우왕좌왕했지만 연장자 코끼리가 우두머리가 되고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가모장에게 얹힌 삶의 무게는 가혹하다. 눈을 감는 날까지 대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칼라하리 사막의 건기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열기를 타고 높이 공중 부양을 하며 누가 죽어 가나 살펴보기나 하는 팔자 좋은 독수리만 빼고는 살기 위해, 오로지 목숨을 부지하고 새끼를 보존하기 위해, 어느 곳이 희망인지도 모른 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몸부림만 있을 뿐이다. 인간처럼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없는 동물들은 그저 태어난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포식자와 자연에게 생명의 일부를 헌납하면서 시간은 무심히 흘러간다.

그렇게 끈질긴 사투의 날을 지내다 어느 날 비가 내리며 우기의 시작을 알린다. 비는 웅덩이를 채우고 물길을 내고 칼라하리를 풍족하게 한다. 사막은 삽시간에 활기를 찾는다. 비는 다음 세대를 예고한다. 굴 속 흰개미들이 날개를 펴고 일제히 날아올라 혼인비행을 하고 그들을 반기는(?) 새들이 날아든다. 철새가 사방에서 우기의 칼라하리를 찾는다.

정지된 듯 보이던 생명의 시간이 다시 흐른다. 식물이 순을 틔우고 초식동물들이 새끼를 낳는다. 먹을 것이 풍성한 때에 자식을 거둬야 한다. 갓 태어난 새끼들이 어미 곁에 붙어서 종종거리며 다닌다. 곤충과 새와 작은 동물과 포식자들이 엉기어 다음 사이클이 이어진다. 물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임을 알리는 순간이다.

자연은 헤쳐 모여를 하지만 생명들은 웬만하면 혼자 다니지 않는다. 최고 포식자인 사자나 표범조차도 새끼 시절엔 다른 동물의 먹잇감일 뿐이다. 그래서 어미들은 새끼를 보호하는 데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호기심 많은 긴꼬리원숭이 새끼가 어딘가 다른 곳으로 향하면 사촌이든 이모든 그에게 따라붙는다. 막 태어난 가젤도 아기 코끼리도 엄마의 다리 사이에 꼭 붙어 다닌다. 떨어져 나가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

그렇게 칼라하리에는 태양처럼 뜨거운 ‘무엇’이 있다. 어미의 자식 사랑이다. 먹이고 보호하고 살려 내느라 자신의 안위를 잊는 생명의 최고 원리이다. 이 원리는 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이든 도시의 문명 속이든 동일하게 작동한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윌슨(E. O. Wilson)은 이것을 ‘혈연선택’이라고 했다. 개체가 근친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모든 상황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다. 여러 영장류·사회생활을 하는 육식동물·협동하여 번식하는 조류·심지어 어미를 도와 함께 자매들을 기르는 진딧물, 그리고 여러 포유류와 조류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포식자가 다가오는 것을 동료에게 알리는 이유를 혈연선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아프리카는 생명과 생명이 부대끼고 이어지는 DNA의 천국이다. 그중에서도 우기와 건기가 천국과 지옥처럼 번갈아 드는 칼라하리는 20만 년 전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출현한 곳임이 밝혀졌다. 가혹한 기후 때문에 인류는 지구 곳곳으로 흩어졌다. 살기 좋은 우기 또한 포식자의 위협이 크니 자식을 지켜 내려는 혈연선택의 결단이 그곳을 탈출하게 했으리라. 인간은 아주 오래전 칼라하리를 떠났고 동물은 남아 있다. 하지만 지구 어느 곳에서든 자식을 지키려는 간절함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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